이경주
LEE KYUNG JOO






집안에 우환이 있을 때 대신 울어주는 집요정 (A House-elf Who Cries on the Behalf of You), 캔버스에 유채, 450×450mm, 2019

무제 (Untitled), 혼합 매체, 가변 크기(각 450 x 450mm, 5개), 2021

환생한 영미 (Reborn Young-Me), 캔버스 천에 유채 및 합성 수지, 803 x 803mm, 2021

영미 (Young-Me), 1303 x 894mm, 2021



현재의 우리에게 모순된…영미와 집요정_강희조 




 영미와 집요정은 어떤 모습인가. 어디서도 접하지 못한 외관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무언가가 뭉쳐져 있는 것처럼 다소 투박하고 섬뜩한 육체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추하다는 생각과 더불어 이 존재들로부터 기인하는 건 불편함과 불쾌함이다. 그렇게 느껴지는 이유는 현실에 있는 인간 뿐만 아니라 어떤 것과도 동일하지도 비슷하지도 않음에 있다. 기존에 인식 체계와 병치되고 모순된 요소를 가진 이들은 ‘그로테스크(grotesque)’하며 자연스럽게 ‘타자’의 위치에 자리하게 된다.

 둘은 감정을 드러낸다. 영미는 웃고 있으며 집요정은 눈물을 흘리고 있다. (눈물들은 <무제Untitled(2021)>로 더 직접적으로 표현된다) 이제는 보통의 대상과 유사성을 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오히려 일그러진 형태에 숨김없는 감정 표현까지 더해져 이 세계에 이질적이다. 그러나 바우만(Zygmunt Bauman)의 말처럼 지금 우리들의 세상은 불확실성, 애매모호함, 불안감, 곤혹스러움이 점철된, 과거와 다른 ‘유동적 시대(liquid times)’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에 이르러 감정을 보인다는 건 이전처럼 자연스러운 자질로 여겨지지 않고 이성적이지 못하다는 것과 동일시 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기피해야 하는 대상, 약함과 부끄러움과 같은 부정적인 의미들을 내포하게 되었다. 급속한 변화의 역기능과 의도하지 못한 결과들로 인해 개인의 측면에서는 인지(cognition)와 정서(affect)의 지속적인 탈구(dislocation)를 초래하였다.1)그러나 우리는 분명 종종 감정의 맹목적 힘, 울고 웃으며 화를 내는 등에 압도당하는 순간을 경험한다. 다양한 감정은 얼굴, 더 넓게 말하면 육체를 통해 드러난다. 영미와 집요정, 이경주 작가로부터 창조된 존재들은 ‘우리’ 그 자체이며 ‘인간’이라는 존재가 육체를 통해 부각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유의 형태를 가진 몸을 통해 표출된다. 여기서 육체는 단순히 물리적인 사물이 아니라 하나의 주체, 즉 유기적인 존재이다.

 그로테스크가 부정되고 금기시되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근본적으로 인간성을 해체하고 있다고 보여졌기 때문이다. 그로테스크는 신성한 인간이 대적해야 하는 ‘타락’의 상태로 보거나, 혹은 세계의 비인격성에 대한 알레고리로 여겨졌다.2)그의 작품들은 이를 뒤집는다. 역설적으로 ‘무서운 존재’들이 우리가 경시해왔던 감정의 힘, 공감과 상호주관성을 내재한 감정이입을 하도록 한다. ‘나’를 ‘타자’로 옮겨 그들의 내면을 간접적으로 이해하게 되는데 직접적으로 자각되는 타자의 육체를 실마리로 한다. 결국 나와의 유사성을 근거로 타자 또한 나와 같은 주체로 유추하고 인지하게 된다. 이렇듯 감정이입의 가치는 타자를 나와 같은 하나의 동등한 인격적 주체로 인정함에 있다. 영미와 집요정은 일그러진 신체를 통해 감정을 표현하고 있고 응시를 경험한다. 우리는 마치 그들이 대신하여 웃어주고 울어주고 있다는 착각에까지 이르게 된다. 바라보는 행위는 간접적 교류를 넘어 직접적인 감정교환이 이루어 지고 인식론적인 타자의 이해를 넘어서서 하나 되는 순간을 제공한다.




1) 염묘섭, 「감정의 시대: 문화와 집합행동」, 『문화와 사회』 Vol. 6. No. 5 (2009), p. 16
2) 박슬기, 「그로테스크 미학의 존재론적 기반과 의의」, 『인문논총』, Vol 58 (2007), p. 198.


영미네 집 (Young-Me’s House), 캔버스에 유채, 2050 x 1303mm, 2021

피흘리는 영미 (Bloody Young-Me), 캔버스에 유채, 1455 x 1121mm, 2021

어릴 적 영미 (Young Young-Me), 캔버스에 유채, 910 x 910mm, 2021

소외된 신체를 긍정하기_장명수 




 이경주 작가의 회화 속 ‘영미’는 각각 어딘가 어긋나 보인다. 영미의 신체 일부는 분명 인간의 신체와 유사하다. 그렇지만 과장되게 큰 눈과 입, 그리고 피부 색은 관람자가 영미가 인간인지 인간이 아닌지 판단하는 것에 대해 혼돈을 야기한다. 영미가 인간이든 인간이 아닌 존재이든, 영미의 신체는 사람들 인식 속의 이상적인 신체 규준에서 벗어나 있다. 영미가 인간의 인식 체계 외부에 있는 신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관람객들은 영미를 보며 익숙하지 않은 불편함과 기이함을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의 인식 밖에 있는 존재라는 것은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고 이는 곧 소외상태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경주 작가는 소외상태에 있는, 언어화되지 않은 존재들을 회화를 통한 이미지로 구현해낸다. 유화 특유의 물질적 특성을 이용하여 시각적인 효과에 집중한다. 유화의 특징적인 질감 탓에 영미에게서는 ‘애브젝트 abject1)성’ 이 나타난다. 애브젝트성에 의해 이미지에서 느껴지는 불편함은 더욱 극대화된다. 이렇듯 작품 내에서 나타나는 영미의 외적 형태와, 작품 질감으로 인해 사람들은 영미를 보며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로테스크의 특성을 가진 대상은 사람들의 인식 체계에 침입하기 때문에 파괴적이다. 기존의 개념을 전복시키기 때문에 위험한 것으로 여겨진다. 위험한 것의 힘을 중화시키기 위해서는 그것을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격하시키며 경멸하는 것 밖에는 방도가 없다. 이경주 작가는 이러한 우스꽝스러움을 역 이용한다. 영미는 과장되고, 노골적이고, 상스럽게 표현된다. 관람객들은 이를 보며 불편함을 느끼지만, 동시에 과장된 생김새로부터 오는 우스꽝스러움 탓에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을 포착할 수 있다. 좋아할만한 특성이 아닌 것이 좋아할만한 것이 되면서, 불편함에서 시각적 재미와 쾌감을 얻는다.

 이경주 작가의 작품 속에 묘사된 영미는 더 이상 소외된 타자의 상태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이상적인 신체 규준에서 벗어나 어긋나 있는 신체를 긍정하며 고정된 사고를 해체한다. 새로운 영미의 신체는 회화를 통해 구현되며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객들과 마주하며 모습을 드러낸다. 이경주 작가의 영미는 이렇게 독자적인 신체를 관객들의 새로운 인식의 범주로 끌고 갈 수 있기 때문에 전복적이고 혁명적이다. 또한 혐오스러우면서 동시에 매혹적인 이중성을 내포하게 된다.

 더불어 이경주 작가의 작품 속에 묘사된 영미들은 관람객들에게 직접적으로 서사를 설명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수용자에 따라서 영미시리즈가 같은 서사 구조를 가지고 가고 있다고 느낄 수 있다. 작가의 작품들 속 영미들은 각각 단독의 영미 그 자체만으로 자유롭게 존재할 수 있지만, 동시에 한 데 모여 하나의 해프닝을 구성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영미의 신체 이미지들은 서로 연관되어 ‘말장난처럼 튀어나간 서사’ 를 형성한다.




1) 주체도, 대상도 될 수 없는 경계에 있는 무엇,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애브젝트를 보통 음식물, 배설물, 월경혈과 같이 몸에서 나오는 분비물로 분류한다